1. 4대에 걸친 기나긴 이야기
'증조할머니 - 할머니 - 엄마 - 주인공'으로 이어지는 4대에 걸친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다. 무려 백년이 넘는 시간의 이야기가 잠시도 지루하지 않게 펼쳐지는 소설이다.
주인공인 '지연'은 서른두 살의 여성이다. 남편의 바람으로 큰 배신감을 느낀 지연은 서울을 도망치듯이 떠나게 되는데, 서울을 떠나 도착한 지역은 '희령'이라는 도시이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 집에 며칠 묵었던 기억 외에는 낯선 도시인데, 우연인듯 우연이 아닌듯 외할머니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된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손녀 '지연'을 할머니는 한눈에 알아보지만, '지연'은 외할머니를 알아보기까지 꽤 걸리는 듯 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 어색한 할머니지만 특유의 따뜻함으로 지친 지연의 마음을 위로하는 할머니에게 지연도 마음을 열게 되고, 할머니로부터 증조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증조할머니는 '삼천'이라는 지역에서 백정의 딸로 태어나 증조할아버지를 만나 도망치듯 삼천을 떠나게 되고, 그 힘들었던 시절을 겪어낸다. 할머니의 입으로 듣는 증조할머니의 이야기는 전래동화를 드는 듯한 느낌이기도 하고, 또 동화라고 하기엔 너무도 생생하고 가슴이 아파서 먹먹하기도 하다.
현재가 힘든 지연은 할머니에게서 듣는 증조할머니의 이야기로 위로를 받으며 점차 안정을 되찾으려 노력한다.
2. 엄마라는 역할의 어려움에 대해
손녀 지연에게는 따뜻하기만 한 외할머니이지만 지연의 엄마에겐 그렇게 다정한 엄마가 아니었던 것 같다. 지연의 엄마 역시 딸에게 살갑거나 다정한 엄마인 것은 아닌듯 보인다. 딸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 잘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딸에게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되고 더 노력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딸에게 실망하는데, 딸은 이런 엄마가 버겁고 힘들기만 하다. 어느덧 나이를 먹은 나의 입장에서 엄마가 힘겨운 딸의 입장도, 딸이 못마땅한 엄마의 입장도 모두 이해가 된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딸에겐 이렇게 모질었던 엄마가 손녀에겐 한없이 다정하기만 한 것도 이해가 되면서 말이다.
읽다보면 엄마가 보고싶고, 얼마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보고싶다.
3. 과거를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들
현 시대에 남편의 배신으로 이혼을 하고, 도망치듯 서울을 떠나 희령을 찾아온 지연의 이야기도 마음이 아팠지만, 옛 시대를 살아낸 증조할머니와 할머니의 이야기 역시 매우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군인들에게 어디론가 끌려갈 뻔한 것을 간발의 차로 면한 채 증조할아버지만 믿고 고향을 떠나온 증조할머니의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고, 남편의 중혼을 알고도 어디에 하소연도 하지 못하는 할머니의 이야기 역시 그렇다. 사위의 중혼을 알면서도 딸에게 결혼을 명한 아버지를 둔 딸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바이 죽어버려요' 라고 말하는 딸의 마음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고, 그렇게 말하고 며칠이 지난 후 정말로 아버지가 버스에 치여 죽었단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또 어땠을까. 좋다 싫다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인 것은 분명하다.
증조할아버지와 팍팍한 세상이 힘들었던 증조할머니에게 위로가 되었던 '새비아주머니', '새비아저씨'는 분명 천국에 갔을 것이다. '희자 아바이(새비아저씨)가 천국에 가지 못한다면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어디있겠냐'라는 한 구절만 봐도 얼마나 따뜻한 인물인지 알 수 있다. 아마도 새비아줌마, 새비아저씨, 증조할머니 이 세사람은 서로가 없었다면 그 힘든 시기를 겪어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가족이 아님에도 이렇게 힘이 되는 존재를 살면서 한번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내가 누군게에게 그렇게 힘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이 이야기를 읽는 처음부터 끝까지 덤덤한 느낌이었다. 주인공인 '지연'이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런지 더욱 덤덤하고, 담담하게 느껴졌다.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아픔에 더욱 많이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여자들의 이야기여서 더욱 감정이입도 많이 되었고, 공감도 많이 해서 그런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고 할머니와 주인공이 나누는 소박한 시간들이 보기 좋았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도 그런 순간들을 많이 만들어 볼 걸이라는 후회도 되었다.
최은영 작가님의 다음 작품도 기대되게 하는 '밝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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